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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발자취│ 1. 무기력함에 견딜 수 없는 하루

피토니아 2021. 8. 1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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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2년,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군대 2년. 총 20년의 기간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고 경험을 했다. 지금은 직장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하며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나는 요즘 강한 무기력함에 빠져 있다. 아침에 일어날 때 전혀 가슴이 뛰지 않으며 열정이 꺼져 간다. 기계적으로 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요즘 어디에서도 가치를 찾기 힘들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분주히 출근 준비를 한다. 회사에서는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한다. 어찌어찌 퇴근을 하면 허기진 배를 채운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고 무언가 힘차게 하기에는 고요한 시간대가 되어 있다. 내일을 위해, 혹은 오늘에 충실하기 위해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이런저런 자기 계발을 한다. 더 지치고 힘들고 몸에 스트레스가 쌓인다. 몸에 쌓인 스트레스는 도통 해결되지 않는다. 남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소하는지 모르겠다. 남들은 운동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취미활동을 하며 푼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이런 무의미하고 힘들기만 한 생활이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이라 생각하면 스트레스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그저 그려려니 하며 자포자기하고 받아들인다. 짐처럼 떠안고 다니는 것이다. 내게 스트레스를 푼다는 건 스트레스를 완전히 없애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들린다.

수면욕, 식욕, 성욕 같은 인간의 기본 욕구는 만족함이 없다. 잠은 매일 저녁 쏟아진다. 밥은 한 끼라도 굶으면 뱃속이 뭐라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다. 성욕은 다른 인격이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육체를 충동질한다. 미디어와 현대의 퇴폐적인 패션과 모든 자극적인 것이 성적 유혹에서 도망쳐보려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수도원에 들어가던지 두 눈을 빼던지 귀를 자르던지 해야 한다. 내부를 잘 다스렸다 할지라도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사람은 지속적인 충동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력과 재물과 명예는 어떤가? 권력은 언제나 더 큰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누군가에게 견제 받는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일 같다. 재물은 더 큰 자본 앞에 무너진다. 탐욕은 단어의 의미처럼 만족함이 없다. 명예는 고상한 인간이 추구하는 것 같다. 보통의 인간은 명예와 거리가 멀다. 애초에 본인이 그리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에게 솔직한 부류의 사람이라면 명예를 추구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스스로 부끄럽기 때문에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민망해하기 때문이다.

설령 수면욕, 식욕, 성욕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하자. 재물에서도 권력에서도 명예도 완전히 통제가능하다고 하자.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채워지지 않는다. 잠잠히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면 계속 무언가를 갈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을 갈구하는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그저 무언가를 계속 갈구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수면욕이라 생각하며 자고, 식욕이라 생각하여 먹고, 성욕이라 생각하여 섹스한다. 여러 친구를 만나고, 돈을 벌고, 소비를 한다. 자원봉사를 해보고 폭력을 써보며 실컷 욕도 해본다. 공부도 해보고 좋은 회사에도 들어가서 어깨도 으쓱해본다. 풍요롭진 않을지언정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경제력을 갖춰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갈구한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보고 실천해봐도 마음 한 구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요즘따라 강하게 무엇으로도 내 안의 갈망을 체울 수 없음을 느낀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C.S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갈망이 내 안에 있다면 그것에 대한 유일한 이성적인 설명은 내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요즘 C.S 루이스의 이 격언을 많이 떠올린다. 가장 알맞은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이런 시련을 주신 것일까. 육체의 덫에 인생을 가두시고 평생을 허비하게 하시는 걸까. 그것이 정말 물음표다. 인생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룰에 따를 수 있다면 축복일 것이다. 하지만 그 룰을 따르지 않는 사람도, 따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 주셔야 하나님의 은혜를 나는 이해할 수 있겠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그 해답으로 주셨다. 좋을 것 같으나, 인생의 진통은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주며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간음한 여인이 용서를 받고 다시 간음한 여인이 되지 않는 게 쉬울까? 그것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죄에서 돌이키라는 말인데, 그것은 마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다시 세우러 오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오호라,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구나.

사람은 아무 것도 없이 이 세상에 와서 아무 것도 없이 다른 세상으로 간다. 손에 쥘 수 있는 게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을까? 남은 건 우리의 영혼뿐이다. 우리의 정신 뿐이다. 우리의 정신이 곧 우리다.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신 하나님. 그렇기에 우리는 로봇처럼, 억지로, 싫어하면서, 무감각한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음으로 , 간절함으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안도함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나하면 육체의 덫은 우리가 끊을 수 있는 종류의 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는 여전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무료하다. 설렘이 없고 죄성이 들끓는다. 하지만 요나처럼 죄의 한복판에서 주의 성산을 바라본다. 하루에 아주 조그마한 것 하나씩 마음을 다잡으며 말씀에 마음을 비추고 뜯어 고친다. 그때마다 나는 시편 1편을, 주의 심판을, 주의 선물을 묵상하며 마음의 허리를 동인다. 세상과 말씀, 양갈래 길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요즘 삶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는 것은 마치 보물찾기처럼 어렵지만, 그렇다고 아직 보물찾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다. 작별하고 싶지 않다.

나는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때를 따라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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